소스에 담긴 것은 정직한 재료와 사랑, 그리고 정성

 

글 성시형 홍보위원

 

 

안산에 도착하니 온 세상이 하얗다. 초행길인데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때마침 마중 나오신 ‘사랑과 정성’의 김현철 대표를 만났다. 큰 눈 때문에 교통편이 마땅치 않을 거라며 역까지 와주신 것이다. 바람은 칼바람이었지만 뜻밖의 마중에 마음이 푸근했다. ‘사랑과 정성’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배려로 시작되었다.

입지(立地)의 나이에 식품업계에 뜻을 두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던 김현철 대표는 30대 중반에 식품업계에 관심을 두고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 신선한 샐러드를 주문 배송하고 우리밀빵을 생산하며 시작한 사업은 점차 다양한 개발이 가능한 소스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사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시중 거래처들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조금씩 지쳐갈 무렵 한살림을 만났다. 밥상도 살리고 농업도 살리는 일에 일생을 바쳐 한살림을 만들고 그 정신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경외심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상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조합원과 생산자가 더불어 만들어가는 한살림의 구조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한다. 결국, 그는 2009년 친환경 제품만을 취급하는 회사로 두 번째 전환을 시도했다. 
 
강직한 한살림을 닮은 깐깐하고 엄격한 경영


‘사랑과 정성’은 한살림 조합원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한 돈가스소스를 비롯해 발효드레싱, 간장드레싱, 땅콩크림, 메밀국수소스, 마요네즈 등을 공급한다. 김 대표는 여러 생협에 물품을 공급하지만,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재료의 수수한 맛을 추구하는 한살림의 조건이 가장 까다롭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전 정신이 생기고, 물품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희열도 가장 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살림을 생각하면 생협의 강직한 맏형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마침 공장에서는 샐러드 채소 본연의 맛과 식감을 잘 살려주는 발효드레싱을 생산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생산설비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대기업 반도체 회사에서 하듯 위생복과 모자, 신발을 신고 에어샤워를 하고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창고의 내부는 어느 곳이나 종류별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고 물품마다 라벨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구석구석까지 깨끗한 공장은 믿음이 갔다. 김 대표는 재료 선별에 있어서는 깐깐함을, 청결과 직원들의 근무에 있어서는 엄격함을 강조했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호텔 주방 쉐프 출신인 강명훈 대리는, 위생과 관리 측면은 대형 호텔보다 더 우수하고 친환경을 추구하는 마인드까지 있어 김 대표로부터 노력하는 관리자의 모습을 배운다고 했다.

 

끊임없는 개발과 도전, 그리고 소통


 

 

‘사랑과 정성’이 생산하는 물품은 한국적 입맛에 맞추고 음식의 편안함 섭식에 무게를 두어 개발한 물품들이다. 김 대표가 나름의 독창성과 아울러 순수성을 바탕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기 위해 대학교 연구실을 찾아다니는 그는 노력형 인간이다. 재료에 대한 지식과 물품 개발에 대한 열정이 만나면 새로운 물품 개발이 시작된다. 그 과정이 길고 지루할 때도 있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그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조만간 어떤 물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그는 조합원과의 소통도 물품 개발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조합원의 요청이 있거나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자신이 개발한 소스에 대해 설명하고, 시식하고, 조합원의 의견을 열심히 듣는다. 그는 생협의 물품은 생산자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과 함께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가 유리병에 담는 것은 단순한 돈까스소스가 아니라 바로 물품과 조합원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다.

젊은 농촌을 꿈꾸며 일구는 만년 새댁

 

글 이미경 홍보위원

 

 

한적한 빈들이 늘어나는 초겨울, 장항선 기차가 멈춘 삽교역에 마중 나온 생산자 부부는 누가 보아도 바쁜 일손을 털고 서둘러 나온 듯 했다. 농한기일 거라 생각했던 안일한 마음 탓일까. 초면에 반가움보다 미안함이 앞서지만, 이 부부의 전원일기 한 장을 들춰보는 기대로 미안함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농촌’에 대한 동경에 이끌린 선택과 출발

 

서울 태생인 김경희 생산자가 농사꾼이 된 지는 벌써 30년째. 막연하게 동경했던 농촌 생활이 가져다줄 여유와 한적함을 그리던 차, 양가 친척 간의 소개로 농촌 총각을 배필로 맞이했다.
남편 김수구 생산자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농사일을 이어받은 터였다. 지인들의 만류를 이해하는 데도, 농촌의 현실을 깨닫는 데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경희 생산자는 세 명의 시동생과 시어머니, 후에 태어난 두 딸까지 오롯이 껴안고 질긴 풀처럼 그러나 결코 각박하지 않게 씩씩한 농촌 아낙의 길을 걸어왔다.

처음부터 남달랐던 농사꾼 남편


 

남편 김수구 생산자는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농약도 덜 치고 자연 그대로 자라고 맺는 것을 거둘 뿐이었다. 당연히 열매를 맺어도 때깔이 곱지 않았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늘 새로운 농법을 연구하고 매달리는 실험 농사꾼이었다. 김경희 생산자는 그런 우직한 남편과 어디 한 곳이라도 손이 비면 금방 티가 나는 농사일을 몸으로 부딪치며 힘든 세월을 보기 좋게 이겨냈다. 이 역시 손 붙잡고 다니며 잘 챙겨주던 남편의 한결같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들 부부는 태평농법과 오리농법의 실패 경험을 토대로 우렁이농법에 성공한 뒤 한살림 예산 자연농회 회원들에게 이를 전파한 데 이어 우렁이도 길러서 공급하고 있다. 또한, 화학비료를 대신하는 녹비 작물인 헤어리베치를 이용하여 유기농 쌀을 생산한다. 논 곳곳에 헤어리베치의 여린 순이 볏짚 사이로 자라나고 우렁이 종패 비닐하우스엔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초제와 화학비료 없이 생산한 친환경 쌀은 한살림은 물론 예산 지역 11개 학교에도 공급하고 있다. 

어울림 세상을 꿈꾸는 쉰일곱의 만년 새댁

 

 

1999년부터 한살림 생산자가 되었다는 김경희님은 “우리 집은 논에 피가 많은 집으로 유명했어요. 한 구덩이는 묵고 풀이 산더미 같아도 마음을 놓아버렸어요. 굶지만 않으면 된다 하고 버티니 다행히 손 벌리러 가는 일 없이 살아왔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생산지가 고령화되어가는 만큼 주작물에 자연재해가 닥쳤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도록, 주작물 외 친환경 농산물들도 더 많이 공급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후덕한 인심이 묻어나는 인상 좋은 김경희 생산자는 아직도 이곳에선 새댁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 만년 새댁은 할 일이 많다. 얼마 전부터는 벼농사의 전 과정에 참여하고 사과 따기를 할 수 있는 도농교류 체험장으로 농지를 개방하여 오는 이들을 반겨 맞고 있고, 고령화된 농촌의 젊은 피가 될 예비 생산자들에게 먼저 손내밀어 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농촌의 고령화로 후계 농을 내부에서 찾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도시민이든 혹은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쉼터 겸 도농 간의 어울림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연내 준공을 앞두고 외관을 드러낸 아담한 쉼터는 농촌을 체험하며 일정 기간 지낼 수 있는 장소로 쓰일 예정이다.

여든다섯 노모를 모시기엔 불편함이 커 보이는, 먼발치에 엎드린 부부의 낡은 집이 눈에 밟혔다. 내 집보다 공동체와 공익을 우선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훌륭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면목이 없다. 이들 부부의 꿈처럼 부디 그곳에 활기찬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를, 우리의 농촌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야무진 일꾼들의 산실이 되기를 빌어본다.

 

우직한 카리스마, 당신은 한살림의 홍반장!

 

글 주은진 홍보위원

 

 

한살림 괴산연합회의 김관식 사무국장을 만나러 가기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슬슬 사전조사를 하였다. 한살림의 그 많은 행사엔 언제나 그가 나타났다며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와 눈빛을 기억하는 주변인들이 대다수였다.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생산자들과 함께하는 행사에는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김관식 국장. 역시나 바쁜 그와 만날 약속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약속 날짜를 두 번 조절한 후에야 마침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가을 햇살이 쏟아지던 날, 충청북도 괴산의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나른하고 달달한 공기가 훅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긴 팔을 흔들며 반기는 김관식 국장. 익히 들은 대로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나오는 묵직한 존재감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생산자의 입장을 정직하게 대변하고 싶어 괴산연합회 사무국장 일을 시작했다는데, 어느덧 7년 차가 되었다고 한다.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산하의 각 권역별 연합회들은 생산자들의 마음을 생생하게 담아 한살림 활동에 반영하고, 도농교류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 생산과 소비가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실무를 맡고 있는 것이 바로 사무국장이기에 연예인을 능가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만나는 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그 역시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한살림 생산자였던 터라 생산자들의 일이라면 언제든지 달려가고, 무엇보다 생산자들의 마음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김관식 국장이 도시 생활을 접고 절박한 심정으로 솔뫼공동체를 찾은 것은 1997년 2월의 일이었다. 초보 농사꾼이었던 그는 참 부지런히 일했다. 겉으로 보기엔 연간 200만 원의 수입을 내는 어설픈 한량 농사꾼이었지만, 7살 난 딸을 둔 가장으로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버틸까?’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가졌던 마을 사람들은 애써 농사를 짓지만, 그 결과는 변변찮은 그의 모습을 보며 지나다 들러 농사도 살펴주고, 일부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도시 생활에 비해 수입은 줄었지만, 도시 생활로 인해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씩 펴지고 날카로웠던 눈빛도 선하게 바뀔 때였다. 하지만 농사일은 고되었다. 토마토를 재배하던 시절, 밤에 짐을 꾸려두었다가 새벽 2시면 대도시로 출발하여 토마토를 팔고 돌아와 오후에 다시 토마토를 수확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쳐가던 어느 날 한살림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한살림은 제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살림 덕분에 어렵게 지은 농작물을 어떻게 팔지 걱정하는 시간에 좀 더 농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는 한살림 활동을 통해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도움뿐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다고 한다. 농사꾼으로서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지금도 ‘생산자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곳이 한살림만 한 데가 없다’는 김관식 사무국장의 믿음은 굳건했다. 하지만 최근 조직이 커지고,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효율성을 위해 인간중심의 관계보다 ‘일’, ‘규율’, ‘물품’ 등이 앞서고, 촘촘하게 짜인 원칙이 오히려 활발한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단다. 규모가 커지더라도 한살림다운 살갑고 인간적인 관계 맺음이 이어지고, 젊은 일꾼들의 패기와 소신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은 한살림을 향한 속 깊은 애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다.
언제 어디서건 한살림 이야기만 한다고 주변에서 핀잔을 듣는 김관식 사무국장이 한살림 안에서 꾸는 꿈은 뭘까. 앞으로의 바람과 계획을 묻자 보다 많은 농민들이 한살림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이 좋아지기를, 한살림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논의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만들어지기를, 한살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내면을 채워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한살림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거칠지만 우
직한 고민과 노력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뼛속까지 한살림 사람’이라 부르는가 싶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밑그림을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덤덤히 풀어내는 그의 눈빛은 희망과 기대로 가득하여 반짝반짝 빛났다.

예술인 부부가 빚어낸 생명을 담은 名器(명기)

 

글 이미경 홍보위원

 

흙을 딛고 일어선 것들이 풍성하게 다가서는 계절, 한 줌 흙 자체의 절정을 재창조하는 청강도예의 정화석․ 곽예정 생산자를 찾아 여주로 떠났다. 여주에는 도예 등록업체만 해도 700여 곳이 있는 도자기의 본고장이다. 강원도 문막 태생으로 원래 화가였던 정화석 생산자가 이곳에 둥지를 튼 사연 역시 치열하고 뜨겁지 않을까.

 

국전에서 특선과 입선 모두 그림으로 인정받았으니 평소 신념대로 ‘그림만이 최고’라고 여길만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처음 만난 ‘원주청년작가전’에서 작품마다 신랄한 촌평을 쏟아내던 장일순 선생은 유독 그의 그림 앞에서만 아무 말 없이 지나갔었다고 한다. 다음날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 이유를 물으니 ‘부처도 자네 작품의 수고와 깊이는 모르겠는걸…’ 이라 답했다고 한다. 이날의 인연으로 지금껏 장일순 선생을 부모와 스승으로 모시고, 선생의 초창기 호(號)인 ‘청강’을 따서 청강도예라 이름 지었다.

그의 그림은 ‘수행도’에 가깝다. 흑비단에 그린 금불탱화를 보는 듯하다. 그림의 배경을 검은색 볼펜으로 일일이 캠퍼스에 그어 칠하여 나머지 옅은 색 여백을 한 폭의 그림으로 드러낸다. 그의 표현대로 ‘그린다기보다는 노동’의 결실이다. 그러나 그 탁월함도 신념의 증거일 뿐 경제적 안정까지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후배의 소개로 이천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것도 최고라고 단정적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솜씨는 날로 일취월장하여 청강도예를 설립한 초창기에 참여한 도자기 엑스포 행사에서 판매 1위를 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정화석 생산자는 IMF 이후 본격적으로 생활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흙과 물과 불이 만나 결국 흙의 물성(物性)을 잘 드러내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흙을 반죽해 돌을 고르거나 이기는 토련기 작업을 5~6단계 거치고, 물레 혹은 프레스로 형태를 잡아 다시 다듬는 수작업을 거쳐 건조․ 물닦이․ 초벌굽기․ 유약 바르기․ 재벌굽기 등의 과정을 하며 보름 정도 지나면 하나의 그릇이 완성된다. 청강도예는 장작 가마 대신 가스 가마를 이용하는데, 각각 다른 특성이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없다고 했다.

한살림에 공급하고 있는 ‘담음’ 브랜드 그릇의 디자인은 대부분 부인인 곽예정 생산자가 맡는다. 원주지역의 연극배우 출신으로 예술적 감각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천도 이상을 견뎌낸 것으로 인체에 무해하나 무겁고 비싸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도자기. 정화석 생산자는 적정 가격으로 단단하되 가벼운 생활자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특히 얼마 전 공방의 규모를 줄여 이사를 했는데, 최근 공급을 시작한 한살림의 주문량이 예상보다 많아 품질관리가 제대로 안 된 경우가 있어 마음고생이 많았던 탓에 단단히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도자분야에서도 다수의 미술대전 입상과 각종 국제교류전 및 개인전으로 명성을 떨친 그이기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컸던 만큼, 각오와 다짐도 새롭게 하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화석 생산자 부부가 가꾸고 세운 아담한 미술관 ‘불이재(不離齋)’에 잠시 들렀다. 공방에서 접한 그릇 몇 점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인간미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저리도 거친 흙에서 모성과 생명을 품고 달관한 눈빛을 한 여인네가 빚어졌는가 하면, 무위당의 미소가 살아나고 인간의 원시적 세계가 대형 청자 도판에 압도적으로 새겨졌다.

“예술이란 이름하에 이어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살림 생활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위안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요.” ‘못난이’ 시리즈 몇 점이 멋들어지게 보이는 순간이다. 이런 정신과 솜씨를 지닌 생산자가 있어 한 차원 깊이 있는 ‘식탁 위의 예술’도 소박하게 만날 수 있겠다.

 

*9월 28일부터 11월 17일까지 열리는 2013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도 청강도예를 만날 수 있다.

별묘마을 의좋은 삼 형제 이야기

 

글 강영희 홍보위원

 

 

왼쪽 뒷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최창섭, 최준섭, 최명섭 부부. 처음으로 함께 사진을 찍는다고 무척 즐거워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과 아우가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논밭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추수 한 후에, 형은 새로 살림을 난 아우에게 자기 몫의 낟가리에서 볏단을 덜어 주고, 아우는 식구가 많은 형을 위하여 볏단을 덜어주다가 둥근 달빛 아래에서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채 말이죠. 밤마다 옮겼지만 똑같기만 하던 낟가리의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서로 고맙다고 말하고 얼싸 안았습니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형제가 한살림에도 있다 해서 복숭아 수확이 한창인 여름날 충주공동체를 찾았다. 충주시 오량면 소태면의 최준섭(74)·최창섭(58)·최명섭(55) 세 분이 소문의 주인공이다.

삼 형제가 도원결의한 마냥 한날한시에 뜻을 모은 것은 아니고, 둘째인 최창섭님이 결혼 직후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사과밭에 제초제를 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는 남과 다른 길을 걸으면 빨갱이로 몰리는 시절이었으니, 쉬운 길 두고 곰처럼 미련하게 풀을 깎다가 무릎이 다 닳아버린 동생을 형님은 걱정스럽게 바라만 봐야 했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봐야 관행농법의 삼 분의 일 수준의 수확량에도 못 미치고 모양도 형편없었지만, 형은 동생이 한살림 생산자가 된 이후에 얼굴에 자부심이 피어나고 점차 판로도 안정되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우를 믿는 마음으로 힘을 보태고, 나도 살고 땅도 살리는 마음으로 한살림을 같이 하기로….

외지에서 중장비 운전을 하다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셋째도 형님 대신 대전까지 복숭아를 운반해 주다 한살림을 알게 되었다. 당도가 덜한 복숭아도 맛없다고 하지 않고 “힘드셨겠다”, “애쓰셨다”하며 격려해 주는 소비자의 마음이 고마웠다. 실제로 조금 닿은 제초제 때문에 거의 한 달을 운신을 못 한 경험까지 더해져 10년째 무농약 밤을 지배하고 있는 막내 최명섭님은 한살림의 최대 수혜자로 자신을 꼽는다. “친환경 농산물을 먹는 사람도 물론 좋겠지만, 농사짓는 내가 더 좋아요. 내 몸에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고, 더불어 땅을 포함한 환경까지 좋아지니 일석삼조에요.”

피를 나눈 형제끼리는 이심전심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동서지간은 어떨까 해서 여쭈었더니, 형님이 마치 친정엄마처럼 살펴주셔서 친정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최창섭님의 부인이신 허금례님은 충주공동체와 충북권역 여성 대표를 맡고 있다. 삼 형제와 동서지간이 모두 우애가 돈독하여 보기 좋았다.

 

석회보르도액이 뿌려진 사과

 

한가족이다 보니 일손이 모자랄 때 서로 거들어주며 농사일을 해왔지만, 맏형인 최준섭님의 복숭아밭 천 평과 사과밭 일부는 올해 냉해 피해를 입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심으면 6년은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딸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뒤이어 농사지을 사람도 없으니 망설여져. 나이가 많아서 힘에 부쳤는데 하늘이 알아서 이렇게 정리해 주시네.” 힘들게 지켜 오신 자식 같은 과수나무들을 잃고서도 무덤덤하게 전하시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한살림 생산자로서 가장 기쁠 때는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땀과 노력의 가치를 인정해 주시며 맛있게 드실 때이고, 힘들 때는 이용 후기의 혹독한 상품평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이다. 사람 손을 거치며 작업을 하다 보니 간혹 거르지 못해 한두 개 조금 상한 채로 소비자에게 전달되기도 하는데 전부가 썩었다는 평을 받으면 헛헛한 마음이 드신단다. 마음 다치지 않게 서로 이해하는 노력을 했으면 하는 속내를 내비치셨다.

하얀 석회 보르도액(병충해 방제를 위해 사용하는 친환경 인증 자재)을 뒤집어쓴 사과밭은 마치 은사시나무 숲 같다.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리다 햇빛에 반짝거린다. 순간 사과들의 속삭임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살림선한 농부로 살아온 세월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곳

 

글 이미경 홍보위원

 

지역에 따라 장맛비와 폭염 소식이 교차하는 요즘, 그 누구보다 근심과 노고에 힘겨울 생산자조합원들을 떠올리며 길을 나섰다. 가는 내내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장맛비의 심술에도 아랑곳없이 강원도 옥수수밭의 꼿꼿한 행렬이 기분 좋은 만남을 예감케 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얼른 알아보고 손짓하며 맞아주는 정겨움이라니…!

“사십 년 전 맨주먹으로 이곳에 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모두 한살림 덕분이에요.”

당시 20두의 소를 먹이며 농사를 지은 까닭에 김종호 생산자는 화학비료 대신 풍족한 퇴비로 농작물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원주에는 새벽시장이 열리는데, 여기에 내다 팔던 김종호 생산자의 열무며 상추가 쉬 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한살림원주 관계자가 수소문하여 김종호 생산자를 찾아왔던 것. 한살림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명농업’에 대해 보고 듣고 배우며 차차 한살림의 이념도 알아가게 되었다.

예순아홉 해를 살아오고 한살림과 십팔 년을 같이하며 어찌 고비나 갈등이 없었을까.

“특별히 없었어요. 난 농업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초창기에 돈 안 되고 힘만 드는 친환경 농사를 굳이 왜 하냐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저를 무척 부러워해요.”

주위의 농가들은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만 반짝 열리는 원주 새벽시장에 참가하려고 매일 같이 새벽 2시부터 줄을 서고 다 못 팔고 남은 것은 일반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단다. 그러니 애써 농사지은 만큼 보상받는 한살림 생산자를 부러워할 수밖에….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원주 제천 간 철도 공사 때문에 땅이 수용되면서 보상을 받게 되었는데, 한살림 생산자라 모든 생산 이력이 빠짐없이 남아있어 땅이 헐값에 넘겨지는 억울함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한살림 안에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인상만큼 선하고 다정한 김종호, 주순예 생산자 부부

 

김종호 생산자에게 농사의 원칙을 물으니 ‘기본에 충실하고 원칙대로 가자’ 일 뿐이란다. 자연의 순리대로 작물이 자라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묵묵히 건강한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자세로 임한다는 것. 현재는 지렁이 분변토와 볏짚을 사용하여 옥수수, 토마토, 애호박을 주로 기르고 있는데, 옥수수는 한그루에 한 개씩만 수확하니 예상량에서 못 미칠 때가 많다고 한다. 올해도 한 망에 다섯 개씩 천오백 망을 어림잡았으나 천 망에서 그칠 것 같단다. 연이은 장마에 토마토도 열과(裂果)가 많아 손해가 크고, 애호박은 한 봉지에 두 개씩 만 오백 봉지가 목표다.

작물마다 이렇게 다 제각각인데 애달아 하지 않는 것은 ‘농사는 하늘이 먹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부족하면 다음을 기약하고 남으면 남은 대로 이웃과 나누어 먹지 절대 딴 곳에 팔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될 수도 있는데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아니 뭐 그냥 나눠 먹지 팔러 갈 시간도 없다”고 아내가 대답하자, 김종호 생산자는 한술 더 떠 “이것이 우리만의 차별화여!” 한다. 천생연분이다.

어제는 없던 것이 돋아나 있고, 또 다음날은 더 야무지게 뿌리내린 것들을 보는 신기한 경험만으로 족하다. 이웃들이 혹은 도시의 자식들이 “어떻게 이런 맛을 내느냐”고 칭찬 한마디 해주는 것이 돈과도 견줄 수 없는 보상이고 보람이란다.

김종호 생산자는 이런 크고 작은 보람들이 농사를 그만둘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며, 생산자들이 힘을 모아 노령으로 더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때를 대비해서 ‘생산자 연금제도’를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생계유지하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나면 노후에 일손을 놓았을 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덕 위에 늘 푸른 집’을 중심으로 야트막한 비탈 위에 옥수수밭 빗소리가 더욱 명랑하다. 그 옆에 나란히 연둣빛 종아리가 발랄한 애호박이 줄줄이 매달려있고 붉을 대로 붉어진 토마토가 지천이다.

“잘 자란 작물은 모두가 광이 나요.”

색과 향과 윤기가 흐르는 것이 어찌 저절로 만들어졌으랴.

한살림 안 하면 결혼할 수 없다고 해서요...

 

글 정영희 홍보위원장

 

바쁜 와중에도 감동적이고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준 김경순, 배종렬 생산자 부부

 

국악과 소리의 고장이자 한살림 대표 포도 생산지인 영동. 그곳에서 한살림생산자연합회 포도 작목회장을 맡고 있는 로맨티시스트 배종렬 생산자를 만났다. 시원한 옥계폭포를 옆에 둔 포도밭에서 아름다운 한살림 부부 생산자가 알콩달콩 키우는 포도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너는 내 운명

배종렬, 김경순 부부의 삶과 한살림은 두 분의 러브 스토리로부터 시작된다. 한살림 초창기 옥잠화공동체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해 온 김경순님은 배종렬님의 첫사랑이다.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지만 김경순님이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두 분이 인연을 맺었는데, 그게 배종렬님이 한살림 생산자가 된 계기였다.

결혼을 심하게 반대하셨던 김경순님의 아버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배종렬님을 불러 사과를

하실 만큼, 배종렬님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달리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도시에서 회사에 다니면서 고향에 내려와 농사도 열심히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살림을 하면서의 힘들었던 일들도 그냥 담담히 풀어내어 듣는 이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결혼 당시 김경순님은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는 한살림 농사를 지어야만 함께 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그 말에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힘든 일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고 지금은 오히려 그가 더 열심이란다. 부부가 함께한 지는 13년째이고, 얼마 전에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장미 10송이를 준비했다며 쑥스러워하는 배종렬님은 아직도 새신랑 같았다.

 

아직 두 번 더 눈물 흘릴 각오로

제초제를 쓰지 않다 보니 풀을 베다 독사를 만난 적도 있고, 화석연료를 이용한 가온을 안 하는 탓에 냉해를 입어

포도나무 95%가 고사하는 시련도 겪고, 태풍 피해로 수확량이 없어 김경순님이 일 년 넘게 식당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살림을 하는 게 즐겁다고 한다.

김경순님은 전남편의 병수발로 진 빚도 있었던 상황이라 시중 포도 가격이 급격히 올라갈 때는 살림하는 입장에서 주변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시중 유기농 업체나 농협에서 계약을 맺자고 찾아오면, 그때마다 한살림 조합원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고 한다. 반대로 작황이 안 좋을 때 부부는 조합원께 직접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포도 박스에 넣어 보냈는데, 진정성이 통한 탓인지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걱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조합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서로 간의 마음 나눔이 한살림을 하는 보람이고 원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한살림 초창기부터 애쓰신 원로 분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되곤 한단다.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 있는데, 원로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아직 두 번은 더 울 일이 생겨도 견뎌내야 한다는 각오가 생긴다고 했다. 앞으로 다시 올 수도 있는 농사의 어려움에 대해 미리 마음을 비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생산자분들의 존재에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부지런한 배가이버!

농사 초창기에 배종렬님이 아내에게 잔소리를 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밭을 맬 때 가장자리부터 깨끗이 풀을 베라는 것이다. 풀이 무성하면 사람들이 지나가다 쓰레기를 버리지만 깨끗하게 깎아두면 보기에도 좋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내 농토를 구석구석까지 살피고 챙기는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무엇이든 자가제조를 하고 차도 거의 스스로 고쳐 쓰는 배가이버이다. 그 또한 부지런함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이들 부부는 돈은 내가 움직이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고 산다. 부부가 그런 마음으로 함께 살면서 13년째 해마다 연례행사로 해돋이를 가는데 한 해를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고 행복을 기원한다. 또 앞으로 10년 정도 농사를 짓고 나면, 그 후엔 트럭을 개조해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한살림을 하는 동안 아내가 옆에 있어서인지 한 번도 후회는 없었다고 한다. 시중에서는 사정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 하지만 한살림은 3년 동안 가격이 동일하니 안정감 있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점도 감사하다고 했다. 사랑과 한살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어려움도 과정의 하나로 생각하는 너른 마음을 가진 배종렬 생산자의 포도가 더욱 탐스럽다. 사랑의 양념이 듬뿍 더 들어가서 영동의 포도가 더욱 달콤한가 보다.

 

기다림으로 빚는 전통

지역마다 가정마다 다른 맛의 특성 이해해야

 

글 이미경 홍보위원

 

다농식품의 변익수, 조정숙 생산자 부부. 멀리까지 늘어선 장독들과 왼쪽'다와의 집'이 어우러진 풍경이 멋스럽다.

 

초정 약수로 이름난 충북 청원 내수읍에 자리한 다농식품. 멀리서도 즐비하게 늘어선 천 여 개의 장독부터 눈에 띈다.

“시어머니가 결혼할 당시 집안 머슴이 다섯 명 일 정도였다니 바깥 일꾼들과 먹일 입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당연히 장독이 그득할 밖에요.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를 거슬러 올라가고 반대로 저에게까지 대물림된 솜씨죠.”

전통 장을 만들기 전, 변익수 생산자는 박봉의 공무원 생활과 일반회사 생활을 접고 아내와 메주 판매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간장, 된장 모두 손수 만들어 먹던 때라 메주가 쉽게 팔릴 리 만무했다. 팔리지 않는 메주로 간장과 된장을 빚어 고군분투하던 차, 청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제 기간 중 펼쳐진 농산물 시장. 조정숙 생산자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시식코너를 마련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고, 뜻밖의 호황으로 가장 기쁜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 밥상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통 장류에 대한 믿음과, 늘 가르쳐주고 토닥여주던 초계 변씨 종갓집 며느리인 시어머니 덕분이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1992년 전통식품 가공업체로 지정받고 1993년 한살림청주에 공급을 하게 되면서 수차례 매스컴을 타자, 대기업의 제의도 줄을 이었다.

  

소품 하나하나에서 주인장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다와의 집'/

 잘 숙성되어 가는 된장을 살피고 있는 조정숙 생산자와 이미경 홍보위원

 

“대기업이 제시한 조건도 매우 좋았어요. 근데 풀 한 포기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정신이 좋아 시작한 한살림인데, 대기업과 거래하려면 수입콩을 써야 하잖아요. 조금 배고프면 어떤가 싶어 과감히 끊었어요.”

다농식품은 현재 매년 30여 톤의 유기농 콩을 사용한 조선된장․간장․메주가루․청국장 등과 장아찌 및 각종 절임류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들의 96% 이상을 한살림에 공급하고 있다. 나머지는 흙살림 꾸러미와 농협, 우체국 판매 등으로 내보낸다. 그래서인지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들과 더불어 고민하고 공유해야할 난제도 없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장류 특성상 지역과 각 가정 나름의 제조방법과 맛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소비자의 입맛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종종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획일화된 입맛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는 것 또한 생산자의 태도임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십년 동안 발품 팔아 모아온 육칠십년 혹은 백년이상 된 장독 속에서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은 과감히 사용하지 않는다. 오래 된 것들이 품고 호흡하며 발효가 되면서 우러나는 장맛을 통해 ‘기다림을 배운다’는 변익수 생산자의 더도 덜도 않는 한마디. 억지로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호미로 긁적거린 세월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주보며 자리 잡은 장독대의 그 풍광도 장관이려니와 마당 구석구석 화초와 어우러진 잔디밭에 오십년 된 고가를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 ‘다와의 집’은 안주인의 정성과 안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욕심나는 걸작이다.

다농식품에는 매년 3~4천명 정도 방문객이 찾아온다. 근래에는 결혼이주여성의 방문도 늘고 있어 이런 사람들을 위한 식문화보급센타겸 체험장이나 된장 박물관, 소박한 갤러리를 마련 해 보고픈 꿈을 내비췄다. 한 뭉치 자본으로 마련한 급조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 여전히 숨 쉬며 말을 건네는 ‘꺼벙하고 우스운 갤러리’를 상상하며 가족과 다농의 역사를 모아두고 있다. 여전히 된장냄새 풀풀 풍기는 부부의 꿈을 응원하며, 끊어지지 않고 오래 갈 우리 입맛의 근원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357+900평 = 전통농법과 우리 쌀 지킴이의 활동무대

글 정영희 홍보위원장

 

 

10여 년 전, 당시 초등생이던 아이들과 감자심기를 하러 갔던 공근에서 땅을 파고 씨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 주시던 생산자분을 다시 만났다. 바로 남궁곤 생산자. 10여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생산지에서의 만남은 우리 조합원에게 세월을 뛰어넘는 감흥으로 남아있나 보다.

 

농사는 천직이고 한살림은 운명

한살림 감자의 주생산지인 공근은 한살림의 가장 오랜 산지로서, 한살림서울과 작년에 꾸러미사업도 같이했고 논살림 활동의 튼실한 터전 역할도 하고 있다. 우리가 찾아간 남궁곤님은 이곳 공근공동체를 책임지는 회장직과 논살림 활동도 담당하고 있는데, 조용하지만 행동이 발빠른 전형적인 한살림 생명 지킴이의 모습니다.

강원도 토박이로 85년부터 공근에 정착한 그는, 자연스럽게 한살림과 인연을 맺고 감자와 쌀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처음엔 손모내기를 하고 직접 피를 뽑는 등 거의 전통농법으로 사람의 품이 많이 드는 농사를 지었는데, 이후 오리농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리농법은 가끔 AI라는 질병으로 된서리를 맞고, 가을이 되면 오리를 처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지금은 우렁이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농사는 내 품 팔아먹는 것이다 보니 아내의 힘이 절대적이다. 연신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인터뷰 중간 중간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쳤다. 많은 생산지를 다니다 보면 오랜 시간 두 손이 맞닿아야하는 일을 부부가 함께 해서인지, 한살림 생산자들은 모두 부부금슬이 좋다. 남편 옆에서 장정 열 사람 몫을 거뜬히 해내는 이희자님은 손수 체험한 논농사의 어려움을 생생히 알려주었다. 못자리를 만들 때 약을 치지 않다 보니 모가 잘 살아나지 않기도하고, 볍씨를 뜨거운 물로 소독하다 보니 물의 온도를 잘 맞추지 못해 모가 안 나오고, 너무 온도가 낮아 키다리병이 생겨 모를 못 쓰기도 했다고 한다. 쌀 한 톨이 나기까지 88번이나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맛있는 쌀을 먹을 수 있다는 데 감사함을 느낀다. 농사일이라는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계신 남궁곤 생산자 내외는 고생담도 일상의 한 조각으로 담담히 읊조렸다.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조용한 품성도 부부가 닮았다.

 

논살림으로 한살림에 또 다른 역할을

 

 

농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이 알고 잘 지키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한살림서울의 논살림 및 논생물 다양성 조사 활동은 남궁곤 생산자의 농지 제공과 도움 덕분에 5년째 진행하고 있다.

논 359평을 내어 생물다양성을 위한 농사짓기를 시작한지4년. 작년에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고 한다. 수확량에서는 우렁농법과 큰 차이가 없지만, 품이 많이 들어 힘이 많이 든다고 했다. 보나마나 힘들 것을 알기에 논살림팀의 제의에 처음엔 많이 망설였지만, 단순히 농사만 짓고 물품을 내는 것만이 한살림 생산자의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과 나도 무언가 활동으로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합원과 함께 농사지은 논에서의 첫 수확도 기뻤지만, 작년 가을걷이에서 판매한 쌀의 밥맛이 좋다는 전화를 받으니 더 보람찼다고 한다. 밥맛이 더 좋은 이유는 아마도 모 사이의 간격이 넓어 벼가 더 잘 여물어서일 것이다. 올해는 추가로 900평의 농지를 더 내어 도시 조합원과 함께 모내기를 하면서 한해 벼농사의 첫 단추를 끼울 예정이다. 더 많은 논생물들이 살아나고 조합원과 자녀들이 그 소중함을 알아간다면 그것이 보람이다. 최근엔 논두렁 옆에 창고를 따로 만들어 논살림팀이 편히 쓰도록 배려 해 놓았다. 도농협업의 활동 모델인 논살림을 지탱해주고 농지를 기꺼이 내어주는 남궁곤 생산자의 잔잔한 손짓과 발걸음에서 한살림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생산자를 믿어주는 소비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글 이미경 홍보위원

 

 

도심의 봄날은 더디게 온다. 꽃샘추위와 황사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에야 감질나게 찾아온다. 수많은 중소도시들의 이름과 떠나는 버스 행렬에 마음엔 이미 남녘의 봄바람이 불어와 설레임이 가득하다. 남부터미널을 출발한지 네 시간 만에 도착한 삼천포. 마중 나온 김찬모 생산자는 얼마 전 총회에서 한살림생산자연합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회장 원년의 밑그림을 들여다본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하 농관원)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star farm ‘샛별농원’. 스타팜은 농관원이 정한 우수관리인증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 가운데서도 모범이 되는 농장을 엄선하여 선발한 것이라고 한다. 고성군 하이면 봉현리에 위치한 참다래 농장 샛별농원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규모이다. 선별장과 저온창고는 물론 도농교류와 농업기술교육 등을 위해 정부에서 지원하여 만들어진 교육장까지 갖추어, 친환경 참다래 재배생산에 관한 기술정보를 전파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결코 스타(!)일 수는 없었다. 시중에서 고가로 팔리던 ‘키위’가 매력적이라 여긴 그는 서른 살이던 1984년, 대구에서 지금의 고성으로 귀농을 했다. 재배농가도 적고 더군다나 친환경 재배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주위의 빈축을 사던 시절이라, 먼 거리 마다 않고 발품 팔고 머리를 싸맨 지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손색없는 친환경 참다래를 생산해 내는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먹는 만큼 돌려줘야 한다’며 자연과 참다래 나무에서 우리가 취하여 먹는 만큼 보충해주고 보살필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자연 살충 살균제로 알려진 솔잎, 마늘, 자리공, 석창포, 은행나무 등 20여 가지를 진공 솥에 넣고 가열한 다음 발생하는 기체를 냉각파이프에 통과 시켜 액화상태로 얻은 천연농약은 영양제 역할도 겸한다고 한다. 타고 남은 재들은 훌륭한 거름으로 쓰이니 제대로 된 순환농법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힘센 농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저 웃는 얼굴, 다정한 모습에 부지런한 여느 집 남편이고 아버지일 것 같은 김찬모 생산자. 2004년 참다래를 공급하면서 한살림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0년이 된 지금, 그의 돈키호테 정신이 다시 한 번 발휘될 기회가 왔다. 임기 2년의 생산자연합회장으로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바깥 활동으로 생업에 지장을 줄 것은 뻔한 일. 아내 조옥자 생산자는 ‘이것도 때가 있는가 보다 싶어‘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고 했다. 그는 감사와 미안함이 반반이다.

“요즘에는 이런저런 것을 듣는 것이 가장 큰일이지요. 새롭게 마이 알아야겠다 싶으니 힘듭니더.” 그는 앞으로 품질향상기술교육 등을 통해 생산자역량을 강화하고, 거점물류센터를 구축하여 더욱 신선한 물품을 공급하며 물류비를 절감하는 것을 선결 과제로 꼽았다. 또한 타 생협과 비교해서 한살림 물품이 싸다는 소비자들이 있어 품질이나 가격정책에 문제는 없는지 살피는 일도 주요 과제로 꼽았다.

 

 

그는 소비자는 생산자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좋은 품질에 대한 상호간의 신뢰와 책임이 뒷받침 될 때만 가능하며, 내가 생산한 물품을 먹고 쓸 소비자가 있고 내가 이용하는 물품을 만들어주는 생산자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서로가 주인 되는 협동조합의 근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농사를 짓다보면 교과서에 나오는 수치보다 경험과 감이 정확 할 때가 많다고 한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써 봐야 기술이 늘어 자재 만드는 기업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듯이, 직접 귀를 열고 발로 뛰면 편중된 일처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도 있었다. 그는 농사에 대해서는 물론 한살림에 대해서도 할 말도 할 일도 많아 보였다. 평소 지론 그대로 힘 있는 행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두의 격려가 더욱 필요할 때다.